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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02 우유재기迂儒齋記 카테고리 이름에 관하여
    우유재기迂儒齋記 2025. 10. 4. 04:30

     환기미술관을 다녀왔다. 환기미술관에서는 김환기의 1969106일의 일기의 구절, “늘 생각하라. 뭔지 모르는 것을 생각하라”(김환기 2019, p. 61)에서 부제를 따온 심상의 풍경: 생각하라, 뭔지 모르는 것을…》을 중심으로 세 개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모색 중인 것이다. 최지혜는 이 전시의 주제인 김환기의 뉴욕 시대를 크게 3기로 나누는데(최지혜 2025), 당연히 전시는 이 각 시기를 대표할 만한 완성작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작품과 작품 사이에 여러 스케치를 둠으로써 김환기가 어떻게 아직 모르는 것을 그려내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전시나 도록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이라 나는 이 스케치가 너무 반가웠는데, 특히 김환기가 앞서 파리 체류 기간에 자신의 딸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구절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영숙아, 연필 장난을 많이 해라. 우리 ‘낙서’라고 있지? 그 백로지 참 좋은 종이다. 연필도 딱딱한 보통 연필이면 된다. 그저 연필 낙서를 해라. 그런 연필 장난 하는 데서 좋은 공부가 된다. 저 유명한 뽈 끌레의 작품을 보면 더러운 종이, 꾸겨진 종이, 찢어진 조각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주워서 그렸구나.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난이며 또한 예술이며 갖고 싶도록 애정이 가는 작품들이냐. (…) 아버지도 파리에 와서 항아리와 제기만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너도 연필과 종이를 손에서 떼는 일 없이 그 골동 그릇 같은 것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연필로 수십 장 수백 장 얼마든지 그려라. 그래서 심심할 때 그렸던 것들을 다시 펼쳐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김환기 2024, pp. 154~155)

     

     그저 많이 그림으로써 공부가 된다는 구절은 미로의 꼼꼼한 다작에 다소 감동되었다. 많은 일을 한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김환기 2019, p. 44)라는 구절로도 바꾸어 읽을 수 있다. 모르는 것을 생각하는 일은 많이 시도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일일 수 없다. 다작의 는커녕 자체가 안 되는 나로서는 되레 이런 구절에서 늘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환기미술관에는 명상적 시간을 경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타피방이라는 애칭의 성당 채플과도 같은 작고 높은 공간”(환기미술관 2022, p. 47)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김환기가 뉴욕에서 남긴 일기(김환기 2019)의 구절들을 읽어주고 있었다. 공간의 의도와 달리 몇 번씩 읽어서 익숙한 구절들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바닥에 놓인 블루투스 스피커를 바라보고, 이런 공간을 구현하기가 이제는 이렇게 쉬워졌구나, 바닥에 작은 지향성 스피커를 위로 향하게 두면 그만이구나 생각하고는 블루투스 스피커가 소리를 높이 보내는 좁고 높은 공간을 잠시 올려다 보고 나오는데, 정말 때마침 김환기의 뉴욕 일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들려왔다.

     

     읽고 잊어버리고 보고 잊어버리고 듣고 잊어버리고. 그러나 안 읽고 안 보고 안 듣고 한 것보다는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어제 시작한 흑직선 그림 흥겨워 더 그리고 밤, 모처럼 과슈 한 점 하다. (김환기 2019, p. 32)

     

     나는 삶의 꽤 긴 시간을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잃어버렸는데, 이 구절은 그런 와중에 남은 몇 안 되는 구절이다. 언젠가 읽고 잊어버리고 보고 잊어버리고 듣고 잊어버리고”, 이 구절을 게시판 제목이든 분류 항목이든 삼아, 읽고 보고 들은 것에 대해 감상이라도 남길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생각으로부터 이 글을 쓰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는지도 지금은 정확히 떠올리기 어렵다. 김환기의 글과 일기가 모두 모여 있던 2005년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으니, 그 사이 어딘가겠지만 잃어버린 시간은 도무지 잘 기억되지 않는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마지막 일기 부분은 2019년에 별도의 책으로 출간되고, 일기를 제외한 부분에 몇 편이 추가 되어 2024년에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두 권 모두 판형이 보기 좋게 바뀌고 여러 사진과 스케치 등이 추가 되었다. 개정판이 나오면 보통은 확인하지 않고 우선 새 책을 다시 구매하는 편인데, 이 정도의 노력만이라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십수 년을 잃어버렸으면, 삶에서 얻을 성취란 것이 기껏해야 짤막하고 쓸모없는 감상뿐이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겨우겨우 받아들이고, 나는 김환기의 저 구절 곁에 성미정의 시 한 편을 두는 것이다. (성미정은 시의 제목이 된 구절을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만화 평론집에서 가져왔다.)

     

    읽자마자 잊혀져 버려도

    쓰자마자 지워져버려도
    사이에
    무명의 슬랩스틱 코미디 콤비
    시인과 고통이 존재하느니

    시인에겐 오래된 변비의 고통
    이 고통에겐 배배 꼬인 시인
    이 시인에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의 고통
    이 고통에겐 이런 뻔뻔한 시
    한 편조차 혼자서는 완성하지 못하는
    시인이

    제대로 교통하지 못해 스텝이 뒤엉킨 채
    무명의 종이 위에 자빠지고 나뒹구는 밤

    아무 쪽에도 쓸모없는 시를 긁적거리며
    살아가는 주제로 고통은 늘 새롭고
    시는 항상 진부하나니

    시인과 고통은 항상 그렇게
    엇박자의 코미디 콤비

    웃자마자 눈물이 맺혀도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시인과 고통은 오늘도 한 편
    건졌으리니
    건졌으려나
    (성미정 2011, pp. 100~101)

     

     

    김환기 (2019), Whanki in New York, 환기미술관

    김환기 (2024),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환기미술관

    성미정 (2011), 읽자마자 잊혀져 버려도, 문학동네

    최지혜 (2025), 김환기의 뉴욕시대(1963-1974) 작품에 대한 연구, 계명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환기미술관 (2022), 뮤지엄 30, 포럼의 공간으로환기 미술관 개관 3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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